박원순 서울시장이 12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의 오전 산행 약속을 앞두고 사법연수원 수료식 당시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주 오래된 사진첩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이라며 오래된 인연을 소개했다.
박 시장은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함께 찍은 문재인 의원님은 그때도 늠름하셨네요. 그 우정을 그대로 간직하며 오늘 오전 서울 한양도성길을 함께 걸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사진이 공개되자, 엄청난 댓글이 달리며 누리꾼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법연수원 12기 동기인 두 사람은 이날 서울 동국대입구역에서 출발해 한양도성 남산코스(장충체육관-남소문터-팔각정-백범광장)를 함께 걷은 뒤 점심식사도 함께 했다.
◆ 문재인 의원은 누구?
문재인 의원은 1953년 경남 거제 출신으로 부산 남항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를 졸업하고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1975년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으로 투옥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78년 육군 병장(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만기제대 후 1980년 경희대 법대를 졸업했다.
그해 치러진 제22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 차석으로 수료하는 영예를 안았다.
판사나 검사로 임관할 정도의 빼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1975년 대학 시절 유신반대 시위를 하다 학생운동으로 투옥돼 서대문구치소에서 수감되는 등 시위 전력 탓에 판검사 임용의 꿈은 좌절됐다.
이에 그해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부산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문재인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법시험 합격은 1980년 5ㆍ18 계엄확대 때 계엄포고령위반으로 구속돼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을 때 발표가 났다. 그때만 해도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바로 ‘영감님’이라고 불리던 문화가 남아 있을 때였는데, 내가 유치장에 갇혀 있으니 경찰은 축하차 온 학생처장, 법대동문회장 같은 분들이 유치장으로 들어와서 함께 소주파티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또 “급기야는 유치장 안에서 외부 인사들과 함께 노래까지 불렀으니 여러모로 착잡하고 비분강개한 기분속의 기쁨이었고, 어쨌든 그 덕분에 며칠 후 석방됐고, 제 삶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는데, 첫 직장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에서 시작했다.
이후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 YMCA 이사,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ㆍ경남 변호사 모임 대표, 부산 NCC 인권위원, 불교 인권위원,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 부산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등을 역임하며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
또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년 부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시민사회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1995년에는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고, 200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으며 자연스럽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정치권에 발을 들어놓게 됐다.
문재인 의원은 자신이 가장 즐거웠던 경우를 사법시험에 합격한 때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를 꼽는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2005년 청와대 민정수석, 2004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노무현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2010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문재인 의원은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그해 12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은 누구?
박원순 서울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 출신으로 1974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재수해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유신체제 반대 학내 시위에 단순 가담했다가 체포돼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제적당했다.
4개월여 수감 생활을 하고 기소유예로 풀려난 박 시장은 독학으로 법학을 공부해 1978년 제2회 법원사무관(3급)에 합격해 춘천지법 정선등기소 소장을 맡았다. 당시 22세였다.
1979년 10.26사건으로 유신이 종식되고, 이듬해 각 대학의 제적생 복교조치에 따라 박원순 시장도 서울대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당시 입학한 단국대 사학과를 택했다.
1980년에는 제22회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1982년 6월 사법연수원 12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면서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하지만 1년 뒤 검복을 벗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시작했다.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학술간사로 활동했다. 1986년에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했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도 지냈다. 1991년 런던정경대 국제법 과정에서 1년간 수학(디플로마 취득)했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1년간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3년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을 맡았고, 5년8개월 간의 지리한 법정공방 끝에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이 공로로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수여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에도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불리는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변호인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던 2000년에는 16대 총선을 앞두고 참여연대와 환경연합 등 전국 42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2000년 총선 부패정치 청산 시민연대(총선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며 낙천 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2001년에는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해 1% 나눔 운동을 전개했다. 2002년에는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하며 나눔 문화를 전파했고,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하며 시민운동가의 대부로 우뚝 섰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자진사퇴로 치러진 2011년 10월 26일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여론 지지을 받던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양보로 박원순은 판사 출신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제35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현재 문재인 의원과 박원순 서울시장은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유력한 대선 후보 반열에 올라 있다.
김민지 기자 news@seconom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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