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간첩 무죄 유우성 “민주주의 찾아 한국 왔다…그만 괴롭히라”

“수사기관의 증거은닉, 날조에 의한 간첩 조작”…국정원, 검찰 등 수사 관련자들 고소

기사입력 : 2014-01-07 16:38
+-
[공유경제신문 김민지 기자] [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찰의 항소로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인 유우성씨가 7일 “수사기관의 증거은닉, 날조에 의한 간첩사건 조작”이라며 국정원, 검찰 등 수사 관련자들을 경찰청에 고소했다.

유우성씨는 자신을 변호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공동변호인단과 함께 이날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북한에 갔다 왔다고 하루아침에 출입국기록이 생산됐는지 저는 정말 억울하다”며 간첩 혐의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했다.

▲7일민변사무실에서기자회견을갖고있는유오성씨와공동변호인단
▲7일민변사무실에서기자회견을갖고있는유오성씨와공동변호인단
특히 유씨는 “저는 정말 간첩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제발 가족과 저를 그만 좀 괴롭히라”라며 “2013년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을 정점으로 앞으로는 다시는 억울한 사건이 없었으면 하는 저의 자그마한 소원”이라고 울먹였다.

유씨는 기자회견 동안 수차례 울먹이거나 눈시울이 붉어졌고, 마이크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기도 했고, 깊은 한숨과 함께 목이 메여 말을 잊지 못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우성씨는 먼저 “제가 북한에 살면서 병원에서도 근무했지만, 그래도 저는 언론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싶은 마음에 중국, 라오스, 베트남, 태국 등을 거쳐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으면서 대한민국까지 찾아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북한 사회가 싫고 독재정치가 싫어서 한국에 찾아와 민주 국가에서 저의 꿈과 희망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덧붙였다.

▲7일기자회견에서여러차례눈시울이붉혀지고,목이메어말을잊지못한유우성씨
▲7일기자회견에서여러차례눈시울이붉혀지고,목이메어말을잊지못한유우성씨
유씨는 “제가 대한민국에 정착하지 1년 뒤에 어머니는 심장병이 악화돼 2005년경 중국에서 대수술을 받고 나서 1년 뒤에 돌아가셨다. 그 원인은 여기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처럼 저도 한 달에 한 번 가족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전화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저와 통화하다가 북한 보위부의 탐지기에 걸려서 갑자기 쳐들어온 보위부에 놀라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는 “저는 갑자기 전화가 끊겨 몰랐는데, 다음날 중국에 있는 친척들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저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루 전만 해도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유씨는 “그래서 저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머니 가시는 마지막 장례식에 참석해야겠다는 마음에 중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2006년 5월 23일 북한에 들어가서 4박5일 동안 어머니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고 언제 다시 어머니 묘소에 찾아가나 싶어 삼우제까지 지내고, 중국 친척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슬픔에 탈수 증세 등으로 그냥 친척집에서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그는 “1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전체 무죄를 받았다. 그런데 2심 재판에서는 1심과는 달리 북한에서 중국으로 나왔다가 1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보위부에 은닉돼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북한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북한에 갔다 왔다고 하루아침에 출입국기록이 생산됐는지 저는 정말 억울하다”면서 “당시 함께 북한에 갔던 친척들도 저와 같이 출입국기록이 똑같이 돼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유씨는 “2012년 저는 동생과 한국에서 살려고 데려왔다. 그런데 2013년 1월 10일경 제가 체포됐고, 동생 역시 간첩으로 수사기관에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아들과 딸이 간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접하고 암흑 속에서 1년을 보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저는 아버지와 동생을 데려다가 한국에서 정착해 같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자그마한 제 소원이다.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간첩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자그마한 꿈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또 “중국에 계시는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고 북한에서 얻은 허리병과 지금 신장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제 재판 때문에 수술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동생은 한국에서 얻은 마음의 병을 앓으며 원인도 모른 채 계속 울기만 한다. 저 역시 1년 가깝게 병원에서 우울증 약을 타 먹으며 재판에 임하고 있다.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며 눈물이 고이며 목이 메었다.

재북화교인 유씨의 여동생은 2012년 10월 대한민국에 정착하고자 입국해 북한이탈주민으로 신고하고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민변은 “당시 국정원 수사관들은 여동생에게 ‘오빠 유우성이 간첩임을 자백하면 오빠와 함께 남한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회유하거나 가혹행위 등을 해 오빠가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유씨의 여동생은 민변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런 내용을 고백하기도 했었다.

유씨는 “며칠 전 저는 변호사님과 같이 <변호인> 영화를 봤다. 30년에 일어났던 공안사건이 어떻게 30년 뒤에 똑 같은 비슷한 일이 제가 당하는지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은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얘기라고 하는데, 저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가 얘기하고 싶었다. 저도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과연 그 사람들이 제 얘기를 들어줄까요”라고 답답해했다.

그는 “제 사건을 맡은 변호사님들은 (국정원에) 고소를 당하고 6억이라는 엄청난 민사소송을 당했다. 또한 저의 내용을 취재하고 있던 뉴스타파 최승호 PD도 고소를 당했고, KBS 추적 60분도 경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은 저는 사회에서 살면서 사람을 참 좋아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을 못 만나겠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그리고 제가 연락을 하더라도 부담스러워 한다”고 덧붙였다.

유씨는 “1년 가까이 저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재판만 하고 있다. 30년 전에 일어났던 <변호인>과 같은 사건이 2013년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을 정점으로 앞으로는 다시는 억울한 사건이 없었으면 하는 저의 자그마한 소원”이라고 읍소했다.

▲1심에서간첩혐의무죄판결받은유우성씨
▲1심에서간첩혐의무죄판결받은유우성씨
이후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다시 마이크를 잡은 유유성씨는 “중국 화룡시 공안국은 정식 출입국기록을 발급 받을 수 있는 기관도 아니고, (제가 삼합세관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삼합세관을 관리할 수 있는 부서도 아니고, 저하고 아무 상관도 없고, 실제로 거기서 관리하고 있는 경찰들은 (검찰이 제출한) 이런 출입국기록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발급해 준적도 없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도대체 (검찰이 증거라며 제출한) 이런 출입국기록은 어디서 나왔는지 계속 (수사기관에) 물어보고 있지만, (수사기관은) 그에 대한 답변은 안 해주고 반복적으로 정상적인 외교채널로 받았다고만 얘기하고 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실제로 민변 변호사들은 이날 PPT 설명을 통해 관련 증언을 영상에 담아 공개하면서 “중국 현지에서 중국 변호사를 통해 해당기관에 확인한 결과, 화룡시 공안국은 출입경기록에 대한 공식발급기관이 아니고, 공민의 출입경기록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공안국’에서 일괄관리하고 있으며, 실제 중국 화룡시 공안국에서는 출입경기록 공문을 발급해 준 사실이 없다”고 확인시켜줬다.

유우성씨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고 싶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 간첩도 아니다. 제발 가족과 저를 그만 좀 괴롭히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또 목이 메었다. 그러면서 “저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저의 작은 꿈을 펼치려고 저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며 살고자하는 그런 사람이다”라고 호소했다.

[로이슈 = 신종철 기자 / sky@lawissue.co.kr]

김민지 기자 news@seconomy.kr
<저작권자 © 공유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