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그다음이다. 자사주 소각이 마치 선한 기업의 증표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시장은 기업의 체력과 산업 특성을 따지기보다 소각 규모부터 재기 시작한다. 기업도 장기 경쟁력보다 당장 주가를 띄우는 선택으로 밀릴 수 있다. 지금 한국 시장이 경계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사주 소각은 분명 효과가 있다.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끌어올리고, 배당 여력 확대 기대도 높인다. 오랫동안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처럼 쥐고 있던 국내 기업 관행을 흔든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다. 주주 돈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상장사가 주주 권리를 더 무겁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계기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자사주 소각이 곧바로 선이고, 소각에 소극적인 기업이 곧바로 반주주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반도체, AI, 바이오, 배터리처럼 선행 투자가 승패를 가르는 산업은 더 그렇다. 이런 업종에선 오늘의 현금이 내일의 생산능력이고, 연구개발이며, 시장 지배력이다. 한 번 늦으면 따라잡기 어렵다. 격차는 숫자가 아니라 시간에서 벌어진다.
미국 빅테크의 최근 행보는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알파벳, 오라클, 아마존, 메타 등은 자사주 매입을 줄이거나 멈추고 AI 인프라 투자에 자금을 쏟고 있다. 주주환원을 포기해서가 아니다. 지금은 주가를 받치는 것보다 미래 기술 주도권을 쥐는 일이 더 큰 주주이익으로 돌아온다고 판단한 결과다. 시장도 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단기 부양보다 장기 성장에 베팅하는 것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상법 개정 이후 자사주 소각 자체가 정책 순응과 주주친화의 상징처럼 소비되는 분위기가 짙다. 물론 왜곡된 자본정책을 바로잡는 데는 필요하다. 다만 제도가 시장 분위기와 결합해 기업에 사실상의 압박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업황이 좋을 때 번 돈을 미래 투자보다 먼저 소각 재원으로 돌리라는 신호가 굳어질 수 있어서다.
이런 흐름이 가장 위험한 곳은 역시 기술 산업이다. AI 경쟁은 천문학적 자본을 요구한다. 데이터센터, 전력, 반도체, 소프트웨어, 인재 확보까지 모두 돈이다. 반도체도 다르지 않다. 공정 전환이 늦으면 고객을 잃고, 고객을 잃으면 투자 여력이 더 약해진다. 기술 경쟁에서 한 박자 늦는 순간 기업가치 훼손은 주가 하락보다 훨씬 오래간다. 주가 부양을 위해 꺼낸 카드가 오히려 장기 주주가치를 해칠 수 있다는 뜻이다.
삼성전자가 이번에 대규모 소각과 함께 대규모 연구개발·시설투자를 병행하는 것은 그래서 예외에 가깝다. 투자와 환원을 동시에 감당할 체력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이런 방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현금창출력과 재무구조, 산업 위치가 다른데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무리수가 된다.
주주환원은 중요하다. 한국 시장이 그동안 이 문제에 둔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주주가치의 본질은 단기 주가 그래프를 올리는 데 있지 않다. 기술 경쟁력을 지키고, 미래 이익을 만들고, 그 성과를 예측 가능하게 돌려주는 데 있다. 소각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더구나 기술 패권 전쟁이 벌어지는 시기라면 기업에 필요한 것은 박수 속 소각이 아니라 냉정한 자본 배분이다.
주가를 띄우기 위해 주식을 태우는 동안, 경쟁사는 공장을 짓고 칩을 개발하고 인재를 모은다. 시장은 당장 소각에 환호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 경쟁에서 뒤처진 뒤 돌아오는 청구서는 훨씬 크다. 한국 기업과 시장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다. 오늘의 주주환원이 내일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환원이 아니라 잠깐의 착시다.
김승한 기자 sharegridla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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